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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꿀 권리(박영숙 지음)

도서관다운 도서관의 방식으로

도서관에는 온 세상이 담겨 있다. 도서관은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재촉하거나 윽박지르지도 않는다. 배움은 인간 잠재력을 끌어올려 생명이 있는 고유한 존재로 성장해 가는 과정이다. 그런데 학교 방식의 교육이 사회적으로 절대적인 힘을 가지면서, 배움을 누릴 수 있는 기회와 통로가 오히려 제한되어 버렸다. 도서관조차 학교교육을 보조하는 기관쯤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다. 빚을 져서라도 대학을 보내려 하고, 아무리 가정 형편이 어려워도 대학 졸업장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도서관을 찾아 책을 읽는 것을 쓸데 없는 으로 생각했다. 이반 일리히가 ‘학교없는 사회’에서 말한  사회 전체가 학교화 되어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다. 학교 자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으로 교육을 변화시킬 수는 없을 것이라는 일리히의 지적에 공감하게 된다. 일리히는 로마 가톨릭 신부로서 뉴욕 빈민가에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한 실천가다.  철학, 신학, 경제학, 역사학,  화학을 비롯한 과학기술까지 다양한 분야의 연구업적을 남긴 그는 교육, 의료, 교통, 환경문제에 천착해 통찰력 있는 성찰과 대안을 제시했다.

 

그는 학교는 교육의 장애가 되고, 병원은 건강의 장애물, 교통수단은 이동의 장애물, 교회는 신앙의 장애물이 되었다고 진단하면서 결국 근대화는 빈곤을 퇴치한 것이 아니라,  빈곤을 근대화 하여 극심한 양극화를 가져왔다고 보았다. 스스로 믿고 알고 고치고 걷고 말하는 고유한 능력을 잃어버린 채, 모든 가치를 제도화 시키고,  제도에 의존하게 된 현실에서 다시 스스로 믿고 알고 고치고 걷고, 말하는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메시지였다. 일리히는 학교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인간이 사회에서 누리는 성공이 그가 소비한 학습량에 따라 좌우되면서 배움이 더 이상 인간의 고유한 활동이 아니라, 생존에 필요한 상품으로 바뀌고 학교가 그 상품 시장을 독점하게 된 현실을 지적했다. 그는 세상을 움직이는 힘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세상을 읽는 눈을 기르고 세상과 상호작용하며 나아가 세상을 변화 시킬 수 있기를 바랐다. 누구든 그런 힘을 키우려면 주어진 교과 과정에 따라 세상에 관해 배우는데만 매이지 않고,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세상으로부터 삶을 배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도서관은 세상 모든 배움을 존중하고 북돋우는 비형식적인 배움의 공간이고,  도서관의 중요한 가치인 지적 자유는 배움에서 평생학습 이념의 핵심 원리인 다양성, 자발성, 일상성이 담보될 수 있는 토대였다. 도서관은 가르치려고 드는 대신 책과 사람을 만나 스스로 배우는 힘을 믿고 존중하는 것, 평가나 경쟁대신 지적 호기심으로 배움의 동기를 찾도록 북돋우는 것, 정해진 교과과정이 아니라 일상적인 만남과 소통이 배움으로 이어지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다

 

교재처럼 순서가 정해져 있지도 않고, 필독목록이 정해져 있지도 않다.  시험을 보는 것도 아니니 어떤 책을 읽어도 좋고 읽다가 말 수도, 읽지 않을 수도 있다. 읽고 나서 반드시 해야 할 과제도 없다. 전공도, 하는 일도, 관심사도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오가며 만나고 어울릴 수 있으니  뜻밖의 배움과 소통의 기회가 곳곳에 숨어있다. 도서관의 역할과 사명은 누구도 소외되지 않도록 정보접근의 평등성을 보장하고 공식, 비공식의 평생학습을 지원하여 정보와 배움의 기회를 적극적으로 제공할 책임을 갖는다.  평생학습사회의 이념은 자발성, 공동체성, 일상성을 강조하는 비형식적인 학습을 일상적으로 실현하여 배움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이다.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따로 있지 않아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다양한 자료를 찾아 자율적인 학습을 이어간다.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정해진 교실에서 교수학습계획에 따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소해 보일만큼 일상적이고 우연한 만남 속에서 배움이 이뤄진다.  스스로 배우고 서로에게 배우며 얼마든지 다양한 배움의 공동체를 꾸릴 수 있다.

 

집단지성의 시대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조건이다. 도서관은 학교도 아니고 시험공부를 하는 곳도 아니다. 책을 보관하는 창고도 아니다.  누구에게나 활짝 열린 지역사회의 정보문화 공간이고, 책을 함께 읽으며 소통하고, 토론하는 역동적인 공론의 장이다. 도서관에서 단 한번이라도 도서관에서 감동받을 기회를 꾸준히 만들어가고, 지적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하고, 복돋울 방법을 끊임없이 찾고 실천하는 곳을 만들고 싶다. 도서관에서 상상력과 실천을 꿈꿀 수 있는 이유는 책과 사람이 만나고 대화하고 어울리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상상하는 삶을 일상 속에서 실천할 가능성이 커진다. 도서관 독서회는 삶터에서 만남이 이어지기 때문에 책 읽기와 토론이 일상 속에 스며든다.

 

책에 몰입한 사람들에게서 전해지는 기운에는 특별한 감동이 있다.  사람과 책의 만남이 빚어내는 화학작용은 커다란 발전소를 하나를 돌리고도 남을 정도가 아닐까 싶다.  책 읽는 즐거움에 빠진 이들의 몰입과 살아남기 위한 경쟁이 빚어내는 긴장,  실패를 거듭하면서 불안으로 숨죽인 정적 사이에는  틀림없이 다른 기운이 있다. 즐거움과 고단함, 자긍심과 자책감, 살아가는 의미와 세상을 향해 꿈꾸는 것과 세상으로부터 살아남아야 한다는 피해의식... 불안과 두려움으로 얼어붙은 사람은 자꾸 곁눈질을 하고 기웃거리기 마련이다. 본래 관심이 지적 호기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평가에 있기 때문이다. 한번도 본적 없는 옛사람의 기록에서도 같은 경험을 발견하게 되는걸 보면, 아주 오랫동안 입증 되어온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쩜 내 생각을 기가 막히게 옮겨 놓았느냐고 마주 앉아 하염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책이 말을 걸고 다가가기를 바라는 이유는  누구든 스스로 책을 만나는 순간을 놓치게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자발적인 동기 없이 몰입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한가지 원칙을 정했다.  앞서서 가르치거나 재촉하며 끌어가려고 하지 않을 것. 다만 사간이 얼마나 걸리든 이유를 찾고 힘을 기를 수 있는 기회와 장을 열어가려고 한다.

 

북돋운다는 말은 가르침, 자선, 치유와 다르다.  내가 원하는대로 깍고 다듬거나 그저 결핍을 채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고지가 바로 저기니 힘을 내라고 채근하거나 괜찮을 거라고 위로하는 것과도 다르다.  도서관에서 그 모두를 누릴 수 있다. 정신이 번쩍들게 만드는 깨달음, 한없는 위로, 세상이 곧 달라질 것 같은 판타지도 만난다. 책을 펼쳐 그 안에 담긴 메시지가 읽는 이의 머리와 가슴에 불을 켤때까지 담담하게 말을 건넬 뿐이다.  이 책들을 읽지 않으면 뒤처질 거라고 으름장을 놓거나 서둘러 가르치려고 들지 않는다.  그 이유는 심장에 풀무질하듯 꿈을 꾸게 되는 순간을 존중하기 위해서다. 누구나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읽고 삶의 주체가 되기 바라며, 게다가 책은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마침내 독자를 만나 왕성한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 책은 道이고 無다. 굳이 표현하자면 기호 '0'이다. 책은 아무것도 아니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무엇이 되어 작용할 뿐이다.)

 

존중이란 오롯이 상대방의 공간을 인정하고 침범하지 않는 것이다.  그가 불안해 하거나 고통스러워할 지라도 그 시간을 통해 내면의 자신을 만나고, 그 안에 잠자고 있던 삶을 흔들어 깨울 순간을 기다린다청소년들의 가장 심각한 난치병은 무기력증일 것이다.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물어도 묵묵부답, 기껏하는 이야기가 '몰라요'이다. 차라리 악을 쓰고 반항하거나 울기라도 하면 좋겠다. 취업에 시달리는 청년들,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젊은 부부들, 자살하는 노인들의 이야기속에서 패배감과 무력감, 두려움을 만난다. 그런 현실에서 하고 싶은 게 생긴다는 말을 듣는다는 것이 불가능한 건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권리와 자유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생애 주기마다 성취해야 할 과업에 책이 어떤 식으로 도움이 된다고 딱잘라 말하기 어렵다.성적이나 돈벌이를 보장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공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필요하다)  생존에 대한 불안에서 한 걸음 벗어나 삶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집이나 일터가 아닌, 어딘가에 경쟁과 생존경쟁에서 벗어나 스스로 사유할 수 있는 제3의 시간, 제3의 공간이 필요한 것 아닐까?  도사관이라는 공간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언제든 경계를 허물고, 소통할 수 있는 관계라는느낌을 준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도서관은 책만이 아니라, 사람들을 만나 정보와 배움을 나누고 소통하는 공간으로 점점 더 의미를 갖지 않을까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