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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꿀 권리(박영숙 지음)

삶의 서사naritive를 위하여

책을 펼쳐든 시간동안 우리는 수많은 만남을 누린다.  세상 모든 역사와 문화, 도전과 실패 전쟁과 화해, 용기와 상처, 러브스토리...  읽는 사람의 내면에서는 저자, 등장인물, 그들의 삶과 그것을 둘러싼 세상,  그 모든 것과 대화가 이루어진다. 그러면서 차츰 알지 못하던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된다. 세상이 조금씩 더 넓어진다.  때론 책을 펼치기 전의 자신과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의 자신이 다르게 느끼질 만큼 다르다. 책 한권을 읽는 사이에 세상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마법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났고, 그런 은밀한 화학작용이 일어나는 곳은 바로 책을 읽는 사람의 내면이라는 것을 우리는 도서관의 일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책으로 일어나는 만남은 사유의 시간을 선물한다토막 지식이나 정보를 넘어 큰 줄기의 맥락을 읽어내는 통찰력이 눈을 뜨면, 당연하게 여기던 것에 '왜'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뒤집어 생각해 볼 수 있는 상상력에 불을 켠다. 망상이 아니라 우리앞에 던져진 문제들을 풀고 대안을 찾아가는 상상력을 키운다.

 

책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것도 그 사람의 지나온 시간, 경험, 지식, 관심, 고민으로 숙성된 눈을 통해서 바라보는 것이다. 책을 읽는 것은 어쩌면 자신이 살아온 시간, 발딛고 선 삶을 읽는 것이다. 의식하지 못했던 선입견과 편견을 한 겹씩 걷어내기 위해 역사책을 읽고, 눈길도 주지 않았던 사회과학서를 읽게 된다.  현상만 놓고 비판하거나 부정할 것이 아니라 배경과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면서 현상에 담긴 의미와 문제, 혹은 대른 대안의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기를 바란다. 반드시 의도된 왜곡이 아니더라도 교과서에 실렸던 지극히 정제된 역사나 단편적인 정보가 우리를 얼마나 진실에서 멀어지게 만들 수 있는지 확인했다인간에게 배움이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아이들을 스스로 학습능력을 가진 존재로 존중하고, 그 능력이 발현될 수 있는 자유로운 환경을 만드는 것을 생각해 본다.  당연하게 여기던 많은 것에 삶을 규정하는 힘이 작동하고 있음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학교를 졸업하면 자격증 취득이나 업을 위한 시험과목이 아닌 자연 과학책이나 지리 같은 평생 읽을 일이 없을거라고 생각했던 책을 읽을 이유가 생겼다.

 

눈을 뜬다는 것이,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되는 것이, 늘 설레고 즐겁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갑갑해도 그럭저럭 남들처럼 살 수 있었는데, 드러나지 않았던 세상의 뒷면을 보면서 오히려 더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워진다는 회의에 빠지기도 했다.  종종 불편한 배움과 사유의 시간을 지내면서 조금씩 담담해지는 힘이 생겼다. 변화도, 성장도, 꿈꾸는 일도, 세상을 자기 스스로의 눈으로 보고, 배움도 사유도 일상의 삶 속에 녹아들때야 가능하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힘이 된 건 고요하게 책에 빠져드는 시간이 우리 자신을 조금씩 단단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아내에게 값비싼 명품가방이나 신발을 사주고, 그 대가로 보상 받을 수 있는 사랑의 유효기간은 얼마나 될까? 아이 앞에 놓인 세상이 더 이상 생존경쟁의 전쟁터가 아니라, 기쁘게 배우고, 맘껏 실패하고, 가슴뛰고, 꿈을 꾸는 무대가 되기 바란다. 아주 작은 것부터 우리가 발을 딛고 선  공간과 시간의 의미를 우리의 머리와 가슴으로 느끼고, 우리의 인성과 상상력으로 변화시킬 수 있기를 바란다. 더 이상 문화가 먹고 사는 일이 해결된 뒤로 미뤄야 하는 값비싼 상품이 아니라,  일상의 풍경이 되기를 바란다팽팽하게 맞서던 이데올로기가 비운 자리를 돈이 채워버린 시대, 양적성장의 끝자락에서 맞닥뜨린 불안한 위험사회에서 그것이 다시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길이 되기를 기대한다.

 

'무엇을 얼마나 가지고 살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에 대해 항상 생각해 보아야 한다. 먹고 사는 문제는 중요하다. 생명을 유지하지 못하다면 삶 자체가 의미없다. 하지만 물질에만 매달리느라 소중한 것들을 놓쳐버리는 현실이 안타깝다. 자존감, 자긍심, 안정감, 막막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가슴을 뛰게 하는 어떤 것,  끝없이 세상을 이해해 가면서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주체로서 존재감 같은 저울에 달아 잴 수는 없지만 저울이 없어도 그 무게를 감지할 수 있는 가치들 말이다.  어쩌면 우리도 생계를 위한 일과 우리 존재 의미를 부여하는 삶 사이에 너무 높은 벽을 세우고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의 말뿌리는 동사 ‘살다’라고 한다. 서정범의 ‘우리말 뿌리’에 따르면 동사 '살다'는 목숨을 지닌 존재가 그 목숨을 이어나가려고 움직이는 모든 동작을 말하는데 ‘사르다’라는 연소작용과 연관지어 만들어진 말이 라고 한다. 생명현상이란 에너지가 옮겨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으니 그 설명이 고개가 끄덕여진다. 마음이나 의식 속에 남아 있거나 생생하게 일어나는 현상,  움직이던 물체가 멈추지 않고 제 기능을 하는 것 생동감 있다고 표현할 때도 ‘살다’라는 동사를 쓴다. 삶이란 낱말 자체가 주는 주어진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먹고 입고 쓰는 행위를 넘어선 의미를 갖는다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그것을 생존이라고 부른다.  삶이란 말에는 자신의 시간을 공간을 세상을 이해하고 느끼고 기억하며, 사유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사람다운 삶이란 어떤 삶인가? 먹고 입고 쓰는 것만이 아니라, 앎을 쫓고 익히고 깨달아가는 삶, 그래서 누구나 한 권의 책처럼 자기 삶의 내러티브를 엮어가는 과정이다.

 

도서관을 만들면서 책이 두려움과 불안으로 딱딱해진 사람들이 생각과 감정을 흔들어 놓기를 바란다. 책을 펼쳐 놓고 벌이는 대화와 사유와 토론의 시간이 출렁이는 물결을 일으키고, 긴 울림을 남기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 고여 있지 않고 새로운 것을 상상하며, 각자 삶의 서사를 엮어가기를 바랬다.  그러기 위해 책 읽기가 즐거움이 되어야 한다.  읽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문화적인 여가가 될 수 있는 책들이 얼마든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