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다수의 남자들은 발기불능으로 인한 고통은 치욕스러운일이며, 또 그 파트너에게 심한 거부감을 안겨준다.
발기불능은 체면과 남성성을 조롱하고, 인격과 외모를 모욕하는 비극적인 단어다. 발기불능의 진짜 문제는
성적 쾌감 상실과는 별 상관이 없다. 파트너와 본인 두 사람 모두의 자존심에 가해지는 상처가 더
큰 문제다.
태초의 유인원은 아직 이성이나 친절 따위가 동물적 충동의 자유로운 흐름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러한 자유로움은 오랜 세월 이어졌다. 수천년 동안 본능은 이성으로부터 이렇다할 방해를 받지 않았다.
마침내 종교와 윤리의 영향이 대중들 사이에 침투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다.
성욕은 뭔가 잘못하고 있는듯한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합법적인 섹스도 그런 의혹을 버리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다.
고의적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수많은 성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간 주범이 바로 문명이다. 인권을
중시하고 인간의 친절과 도덕적 교양을 존중하는 우리의 문명 말이다. 이것은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수 없다. 사랑과 상냥함의 능력이 진보할수록 그것이 도리어 우리를 너무 과민하게 만들어 이성을
유혹하려는 시도를 주저하게 만들수도 있다니. 문명은 남녀 관계에 있어서 관대함, 세심함, 평등의식,
공평한 가사분담과 같은 긍정적인 것들을 많이 가져다주었다. 문명화가 우리의, 아니 적어도
남자들의 성관계를 더 어렵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문명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는 잘알고 있다.
자신의 욕망을 막무가내로 요구하거나 거칠게 밀어붙여서는 안되고, 다른 사람을 단지 우리 자신의
욕구 충족과 쾌락을 위한 수단으로 여겨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선의의 행동이지만
뜨거운 갈망에 대한 기회를 놓치게 될 가능성이 많다. 우리는 이성적인 문제와 일상의 여러 심란한 일들을
생각하느라 머리가 복잡하다. 그래서 외부 개입이 있어야 육욕적 자아와 가까워질 수 있다. 소심함으로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된 교착상태를 깨려면 한쪽이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줄까봐 조마조마해하는
마음을 극복해야 한다.
근본적으로 따지자면 발기불능은 지나친 존중이 병이 되어 나타나는 증상이다. 파트너에게 자신의
욕망을 강요하는 무례를 범하거나, 파트너의 욕망을 채워주지 못해서 불쾌감을 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앞으로 미래의 남자들은 자신의 높은 지적수준과 깊이 있는 정신수준,
온화한 성품을 내비치는 수단의 하나로서 잠자리에서도 조건적으로 행동하게 될지도 모른다.
맞벌이 생활을 하고 있는 부부는 솔직히 불만이고 뭐고 남편에 대해 생각할 여유 조차 없다. 기분이
좀 울적했고 혼자 있고 싶은 데다, 다음 날 처리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면 머리가 아플 뿐이다. 화가
치밀어 오르는 구체적인 사건이 너무 정신이 없고, 어수선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경우에 곧잘 멍해지고
우울해져 잠자리를 피하게 된다. 기분을 상하게 만든 일들이 너무 사소한 일이라면, 입밖에 꺼내어 봐야
본전 못찾는다. 대부분은 너무 까다롭다거나 별나서 그런 것이라고 결론나고 상대방은 어처구니 없어한다.
세상의 거의 모든 커플은 객관적으로 보기엔 매우 사소하고 터무니 없는 일들을 놓고, 비슷비슷한
말다툼을 벌이곤 한다. 어떠한 남녀관계든 예외가 없다. 그러다 나중에 원망이 생긴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견지에서 본 그 사람의 이상적인 모습을 그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다시말해 난이도가 상당히 높은 문제에서 부터 하찮은 문제에 이르기까지 무한한 영역에 걸쳐 상대방을
완벽함의 화신으로 만들고자 애쓴다. 따라서 사랑을 하는 동안에는 자신의 여러 이상들 중 하나가
배신당하는 고통이나 분노를 느낄 가능성이 다분하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게되면 더 이상 사소한 일
같은 것은 없어지니까.
커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작은 화살을 서로에게 쏘아된다. 일주일이면 수십발도 넘을 것이다.
이런 작은 상처들은 표면적으로 큰 흔적을 남기지는 않는다. 기껏해야 거의 감지할 수 없는 약간의 냉랭함이
감도는 정도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거의 감지할 수도 없는 그 냉랭함 때문에 한쪽 혹은
양쪽 모두 상대와의 잠자리를 피하기도 한다.이렇게 되면 점점 더 악순환의 소용돌이에 빠져든다. 성적으로
서로에게 냉랭해지면 상처를 입는다. 그러나 그들 자신도 그런 상처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채 은밀한 공격과 앙갚음을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훌륭한 사회 구성원이라도
파트너는 매우 치졸하게 돌변한다. 이러한 감정 대립이 야기하는 시간과 에너지, 감정의 낭비를 생각하면
당혹스러울 따름이다.
지식은 지식일 뿐이며 지식을 그대로 실제에 반영할 수는 없다. 우리는 화가 나면 순식간에 이성을 잃거나
실망에 빠지고 만다. 잠깐 숨을 돌리면서 기억 속에 어딘가에 남아 있을 남녀 심리에 관한 지식을 꺼내볼
틈이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좀 더 질서가 잡힌 곳이라면, 너무 늦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스스로가 노력을
기울인다면, 서로를 향한 적의의 근원을 알아가게 될 것이다. 일주일에 한번 커플 심리치료를 받는 것도 좋은
방법 일 것이다. 심리치료사는 과거 특별한 사건 때문에 현실을 왜곡하거나, 잘못 해석하는 일면들을 지적해
인식시켜 주기도 한다. 악의적이고 못된 사람이 아니라, 상처 받고 가슴 아파하는 사람으로 봐주도록 설득한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요령에 관해서라면 필요한 것은 이미 알고 있으니, 굳이 무엇을 더 배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 잘지내기란 혼자 힘으로 풀어나갈 수 없는 어려운 일이다. 직장에서는
직원들 간의 인간관계에 심각한 반목이 생기지 않도록 여러가지 제도와 절차를 마련해 놓는다. 반면 현대
연인들은 외부의 도움을 받는데 주저한다. 더 발전적인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것에 대해 생각을 많이,
그리고 끊임없이 하는 것만이 서로의 관계를 파탄으로 몰고가지 않도록 지켜줄 유일한 방법일 수도 있다.
우리 시대 남녀관계를 지배하는 통념은 이상적인 사람을 찾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지금 바로 옆에 있는 한 사람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우리 부모님들은 자신들이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쏟아야 한다고 말해주지도 않았고, 또한 자신들의 약점, 걱정, 욕구를 드러내는 일도
드물었다. 그리고 연인으로서의 행동보다는 부모로서의 행동을 더 훌륭이 해냈다. 잘 맞고 무난한 남녀관계에서
조차 원만한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미처 그럴 마음의
자세를 갖추지 못한다. 사랑에 대해 균형잡힌 시각을 가지려면, 어린 시절에 사랑받던 느낌을 기억하기보다는
부모님이 우리를 사랑하는데 무엇을 감수했는지, 다시 말해 얼마나 큰 노력을 쏟았는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