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나 한잔 들고가게!

우리나라 아이히만

백파 2025. 4. 19. 10:42
이번 봄은 오지 않을 것 같더니 벌써 지나간다. 온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고 어수선하다.
 
이번 탄핵정국을 경험하면서, 미디어를 통해 많은 정부 고위관리들의 민낯을 보면서 아돌프 아이히만이 떠올랐다. 나는 두 번 정도 아이히만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도 아이히만이 많다. 자신이 정부 고위관리로써 자신이 무슨 일을 헤야하는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아무 생각 없는, 좋은 대학을 나오고 해외에서 공부한 많은 엘리트들이 그들이다.
다음 내용은 김필영 교수의 ‘평범하게 비범한 철학 에세이’의 내용 일부를 정리한 것이다. 김필영 교수는 나의 서양철학에 대한 스승으로 나 혼자 생각하고 있는 분이다.
 
..우리는 잘못을 하거나 부도덕한 일을 저질렀을 때 어느 정도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사소한 일에는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커다란 악을 행하고서는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아니 자신이 악을 행하고 있다는 사실 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왜 그럴까? 예일대학 사회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은 ‘처벌에 의한 학습효과’에 관한 연구에 필요한 실험을 했다. 밀그램 교수는 인간은 권위에 쉽게 복종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사람들은 권위자가 명령을 하면 그것이 아주 위험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아무 생각 없이 기꺼이 복종한다는 것이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나치 친위대 장교였다. 나치의 유대인학살 작전의 책임자였다. 아이히만은 처음에는 구덩이를 파고 유대인들을 몰아넣은 후 총살을 시켰다. 그런데 총살을 실행한 나치 군인들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고통을 받았다. 게다가 ‘굳이 왜 총알을 낭비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유대인들을 죽이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냈는데 그것이 바로 가스실에서 처형을 한 것이다.
 
사람들은 아이히만을 보기 전에 사이코패스거나 미친놈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머리 벗겨진 사람 좋게 생긴 아저씨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아이히만은 맡은 일에 취선을 다하고 가족들에게 사랑받는 매우 성실하고 자상한 아버지였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그는 군인으로서 상관의 명령을 성실하게 따랐을 뿐이라고 한다. 아무런 권한이 없는 배달부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군인으로서 상관의 명령을 따른 것이 무슨 죄가 되느냐는 것이다. ‘인간적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느냐’는 물음에 오히려 ‘상부에서 시킨 일을 하지 않았을 때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지, 시킨 일을 열심히 했는데 왜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하냐?’고 했다.
 
‘아이히만의 정신이 이상한가?’해서 재판을 하면서 정신감정을 받았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소견이 나왔다. 그냥 정상적인 보통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때 한나 아렌트는 깨달았다. ‘특별한 악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구나. 누구나 어떤 상황으로 돌아가면 악행을 할 수 있는 것이구나.’ 한나 아렌트는 이것을 ‘악의 평범성’이라고 했다. 악은 그냥 평범함 속에 있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은 무죄일까? 아니다. 아이히만은 무죄가 될 수 있을까? 아니다. 아이히만은 무죄가 될 수 없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은 아주 근면한 인간이다.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유죄인 명백한 이유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생각 없음 그것이 유죄인 이유다.
 
이것은 아이히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는 종종 아무 생각 없이 권력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면서 악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도대체 왜 그럴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대략 세 가지 이유를 꼽을 수 있다. 첫째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변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행위에 대해 온전히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둘째 권력은 자신이 지시하는 것이 악이 아닌 것처럼 포장하고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나치는 유대인 대량학살계획을 최종 해결책이라고 불렀고,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히로시마에 떨어뜨린 원자폭탄에 ‘리틀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학살이 학살이 아니고 폭탄이 폭탄이 아닌 것처럼 언어를 순화한 것이다. 이런 예는 많다.
 
회사에서 직원을 자르는 것을 ‘구조조정’이라 하고, 전쟁에서 발생한 민간인 사상자를 ‘부수적 피해’라고 한다. 이렇게 권력은 악행을 정당하다고 포장한다. 나치는 유대인들을 그리스도를 죽인 야비한 민족이라고 하면서 자신들의 악행을 정당화 했고, 미국은 이라크침공을 이라크 자유작전, 즉 이라크 국민에게 자유를 안겨주기 위한 전쟁이라고 했다. 셋째 우리가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생각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유럽전역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을 모아 기차에 태워서 아우슈비츠로 수요소로 이송하는 것이다. 아이히만은 그 일을 너무나도 훌륭하게 수행했다. 문제는 아이히만은 ‘자신이 왜 그 일을 해야 하는지’는 몰랐다는 것이다. 그 일을 하는 이유나 목적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 일이 자신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지 생각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자신이 왜 유대인을 학살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는 것이다. 악은 우리 사회 도처에 있다.
 
권력이 있는 곳이라면 이러한 악은 더욱 심각해진다. 악은 정치적 정파를 가리지 않는다. 권력은 관료조직으로부터 나오고, 관료조직은 상명하복의 분위기에서 개인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왜’라고 묻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히만은 정말로 아무 생각이 없었을까? 정말로 나치의 명령을 따르기만 한 것일까?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아이히만이 유대인 학살에 가담한 이유는 나치의 명령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몇 가지 증거들이 있다. 1945년에 나치 독일의 폐색이 짙자 아이히만의 상관이었던 힘러는 유대인 학살 중지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아이히만은 그것이 히틀러의 직접 명령이 아니라는 이유로 유대인 학살을 계속했다. 아이히만은 단지 나치의 명령을 수행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 학살에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개입했다고 볼 수 있다.
아이히만은 재판과정에서 무죄를 주장하기 위해서 자신은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처럼 사람들을 속인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한나 아렌트가 사실은 아이히만에게 속았다’고 비판한다. 아이히만은 한나 아렌트를 속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진짜로 속인 사람은 한나 아렌트가 아니라 아이히만 자신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의 신념을 자신의 신념이라고 스스로를 속인 것이다. 히틀러에 의해서 주입된 가짜 신념을 자신의 진짜 신념이라고 착각하게 된 것이다.
 
왜 이런 착각을 하게 된 것일까? 아이히만이 아무런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각에 대한 성찰 없이 히틀러의 생각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나 아렌트의 결론은 옳다. 아이히만이 유죄인 이유는 ‘생각 없음’, 즉 아무런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은 아무런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히틀러 명령을 자신의 명령으로 내면화했다. ...
많은 사람들은 오로지 생존을 위해 살아간다. 삶의 의미에 대해 자신의 일에 대한 의미에 대해 생각 없이 살아간다. 하지만 적어도 국민의 세금으로 먹고 사는 정부의 고위관리들은 자신의 일에 대한 그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 왜 자신이 이 일을 하고 있는지 특히 권력을 가진 사람은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