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파 2025. 2. 24. 17:36

아이 교육에 대해 알려면 기본적으로 인간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야 한다. 인간은 모든 동물 중에서 가장 미성숙한 상태로 태어나 스스로를 무엇으로 만들어 나가는 존재다. 우리가 라고 하는 존재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인간은 유전자와 환경에 지배를 받는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다르다.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 환경에 적응하여야 한다. 끊임없이 외부 자극을 지각하여 정신을 만들어 외부 자극에 대응한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자아가 만들어진다. 일상의 환경에서 외부 자극에 의해 만들어진 정신으로 자아가 대응한다. 자아란 외부 자극에 반응하는 실체다. 그러한 과정이 인간의 작동방식이다.

 

정신이 성숙하려면 자극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사고력이라고 한다. 그러한 능력은 경험과 책 또는 학교공부를 통한 학습으로 길러진다. 사고가 행동하기 위한 시작이다. 깊은 사고력은 어떤 상황에서 현명하게 판단하며 잘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이다. 어떤 자극에 자아가 적응하기 어려울수록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외부 도움을 받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자료를 찾아볼 것이고 스스로 다양한 궁리를 할 것이다. 이것이 정신적으로 성숙해지는 과정이다. 이것은 책으로 학교에서 교과목으로 가르칠 수는 없다. 그래서 다양한 경험이 사고를 더 깊게 하고, 시련이 사고력을 향상시킨다. 독서도 대상을 지각하고 사고력을 향상 시키는 방법이다.

 

요즘 아이들 대부분은 꿈이 없다. 어떤 아이들은 막연하게 꿈을 이야기하지만 절실하지 않으며, 어른들에게 학습된 꿈을 이야기한다. 꿈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옛날 먹고 살기 어려운 환경에서 아이들의 먹고 살기 위해 무엇이 되고자하는 꿈이 절실한 것이다. 왜 꿈이 중요한가? 꿈을 이룬다는 것은 내 나름의 방식으로 주어진 환경에 잘 적응하는 것이다. 꿈이 살아갈 동기가 되고 몸이 작동할 방향을 제시한다. 잘 산다는 것은 이루고자 하는 꿈이 있고. 그 꿈을 위해 일상의 삶에 몰입하고 즐기는 삶이다. 그 꿈을 이루고 못 이루고는 그 다음이다. 주어진 상황에 적응할 수 있는 정신이 만들어지고, 꿈이 있고 그 꿈을 향해 열심히 살아가는 삶이 잘 사는 삶이다. 환경도 변하고 나도 변하고 꿈도 변한다. 주어진 환경에서 열심히 사는 것이다. 열심히 사는 능력은 어려서부터 키워져야 한다. 그래서 자존감, 자신감이 중요하다. 이러한 정신은 자신에 대한 믿음이고 이 믿음은 애착에서 나온다.

 

아이와의 게임에서 물러나지 않는 것, 아이들로부터 거리두기를 허용하지 않는 것은 아이들과 우리를 위해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다. 사실 끊임없이 거절당하는 느낌만큼 마음 상하는 일은 없다. 그래도 우리의 무한하고 깊은 사랑과 보다 나은 날에 대한 희망으로 성실하게 행해야 한다. 좌절감과 절망감이 느껴지는 상황이라도 이 전장을 떠나서는 안된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기다리는 한 우리의 아들과 딸이 돌아올 가능성은 충분하다. 때때로 화를 참지 못하고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아이에게 최후통첩을 하는 부모들도 있다. 제대로 하든지 아니면 그만두라는 식의 요구이다. 그것이 엄한 사랑과 같은 의례적으로 사용되는 기술이든, 그저 아이를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려고 배짱을 부려보는 것이든, 또래지향적인 아이에게는 거의 효과가 없는 방법이다.

 

최후통첩은 그런 거래를 할 만큼 충분한 애착을 전제로 해야 한다. 때로 최후통첩은 실제로 최후통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책임을 놓거나 포기하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부모는 지긋지긋해진 것이다.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나 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는 에너지가 부족한 것이다. 그런 경우라면 일단 떨어져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게 낫다. 우리의 감정을 억누르고 아이들의 감정을 수용하면서 아이들의 편에 다시 서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할 때, 아이들에게 관계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게 된다.

 

주로 감정을 통해 애착을 형성하는 아이들은 신체적인 접촉이 부족할 때 분리된 느낌을 받는다. 충성심을 통해 애착을 형성하는 아이들은 부모가 자기 의견에 반대한다고 생각할 때 소외감을 느낀다. 친밀한 느낌을 여전히 감각에 주로 의존하는 아이들을 다루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럴 때는 연인들의 수법을 빌려오는 게 좋다. 피할 수 없는 분리의 간극을 잇도록 부모가 아이를 도울 수 있는 유용한 방법들이 있다. 부모의 사진 특별한 장신구나 사진 등을 놓을 수 있는 목걸이, 읽을 만한 메모, 아이가 떨어져 있을 때 지니고 있을 부모의 물건주기, 정해진 시간 전화하기, 특별한 노래나 이야기를 부모의 목소리로 녹음해서 주기, 특별한 시간에 열어볼 수 있는 선물주기다. 애착을 유지하는 또 다른 방법은 같이 있지 않을 때 아이에게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는 것이다. 아이에게 우리의 일터를 구경시켜주는 것도 도움이 된다.

 

아이들이 서로 나누는 이야기는 대개 다른 사람에 대한 비밀이거나 자기 자신에 대한 피상적인 정보들이다. 상처입기 쉬운 부분은 거의 털어놓지 않는다. 부모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자기의 깊은 곳까지 알고 이해한다는 느낌에서 오는 친근함은 물리적 분리의 가장 힘든 장애도 초월할 수 있다. 우리는 아이들이 최대한 쉽게 속내를 나눌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주요 목표는 아이들을 고치거나 가르치는 게 아니라, 그들과 결합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래지향적인 아이에게 또래지향성이 아이를 잘못 인도하고 있다거나, 그런 것이 하나도 이로울 게 없다고 이야기해주는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차례차례 단계를 밟아 아이들을 되찾는 길 외에는 방법이 없다.

 

현재 우리 문화에서 산다는 것은, 아이들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일말의 여지도 없는, 승자가 모든 것을 가지고 패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꼴찌는 악마에게 휘어 잡히는 치열한 전투를 가슴으로 치르는 일이다. 물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억지로 아이들이 우리와 함께 있고 싶어 하고, 우리에게서 방향을 구하고, 우리를 사랑하게 만들 수도 없다. 아이들이 우리를 위해 착하게 굴도록 만들 수는 없고, 그들의 친구를 우리가 결정할 수도 없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에도 한계가 있다. 아이들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강요해서도 안 되고 그들을 가까이 붙잡아 두기위해 물리적 힘을 사용해서도 안 된다. 그렇다고 우리의 건강이나 살림을 운명에 맡기면 안 되는 것처럼, 아이들과의 애착을 운명에 위임해서는 더더욱 안된다.

 

문화에 대한 우리의 역할중 하나는 우리가 소중히 여기고 가치를 보호하는 것이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이것이 시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는 운동과 적당한 고독이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위해 중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스스로 지속적으로 충족시킬 만큼 몹시 급박하게 그런 필요를 느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운동과 명상적인 고독이 일상적 행위들 속에 녹아있다면 우리를 건강하게 할 것이다. 우리 문화가 서서히 파괴되면서 가정과 부모- 자녀 관계의 신성함을 보호하는 의식들도 역시 점차 무너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부모들은 스스로 직접 자기들만의 일상의 가족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또한 그것들을 보호하는 애착의식들이 필요하다.

 

아이들을 우리에게서 앗아가는 것을 제한하고 동시에 아이들을 모을 수 있게 해주는 틀을 만들어야 한다. 텔레비전, 컴퓨터, 인터넷게임, 과외활동 등에 규칙과 제한을 적용시켜야 한다. 아이를 책임지는 어른들의 지시를 받지 않는 자유로운 상호작용에 분명한 제한을 가해야 한다. 부모가 적절히 제한을 가하지 않으면, 아이들끼리 만나고 모이고 메시지를 주고받는 시간은 걷잡을 수 없게 늘어날 것이다. 또래와의 접촉 욕구는 금방 부모와의 친밀감에 대한 욕구를 앞지른다. 우리에게 칼자루를 쥐어주는 규칙, 힘이 없다면 더욱 더 경쟁하기 힘들어진다.

 

우리에게 아직 힘이 있을 때 틀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을 그냥 운명에 맡기면 우리 사회의 가족들은 개인적 추구, 사회적 요구, 경제적 압박, 그리고 우리 아이들의 일그러진 본능에 의해 점차 조각조각 찢어질 것이다. 가족끼리 보내는 휴가, 가족끼리의 축하잔치, 가족이 함께 하는 게임, 가족활동이 필요하다. 가족의 식사는 아이를 품안으로 모으는 좋은 의식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아니면 아이들이 우호적으로 지내고, 아이들에게 의지할 수 있는 무언가를 제공하고, 우리에게 의존하게끔 아이들을 꾀어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다른 활동이 무엇일까? 가족이 함께 식사하는 보다 근본적인 목적은 애착이다. 하지만 가족끼리 둘러앉아 하는 식사는 이제 보기 드문 일이 되었고, 가족끼리 식사를 하더라도 그것은 연료를 채우는 형식적인 활동에 가깝다. 가야할 곳이 있고, 해야 할 일이 있고, 컴퓨터도 해야 하고, 사야할 것도 많고 텔레비전도 봐야 한다. 먹는 것은 그저 다음 일을 준비하게 위한 행위로만 생각한다.

 

부모와 잘 결합된 아이들은 가족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아이들을 친구로 선택하게 된다. 또래지향적인 아이에게 인생의 목표는 또래들과의 접촉이라는 것을 늘 명심해야 한다. 그들에게 그런 추구를 방해했을 때에는 엄청난 애착 좌절이 초래되기 때문에 부모들은 적대감, 공격성과 마주칠 준비를 하는 편이 낫다. 우리가 풀어야 하는 난제는 단순히 그들을 또래에게서 분리시켜 놓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우리에게서 그들을 빼앗아간 과정을 되돌리는 것이다. 우리가 가한 제한으로 인해 애착결핍이 형성되었다면, 우리 자신이 그 자리를 채울 준비를 해야 한다. 나는 부모들이 자신감, 인내, 그리고 이와 함께 끝까지 유지될 따뜻함을 갖추기 전까지는 이 같은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권하지 않는다. 고작 책 한권 읽고 부모역할을 하려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행동과 태도, 우리가 하는 일이 아이를 위한 최선이라는 깊은 자기 확신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 자신의 통찰력에 대한 확신과 신념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헌신을 필요로 한다.

 

아이의 행동에 지시를 내리는 것은 부모가 풀어야 할 도전 과제이다.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는 아이를 우리가 어떻게 제어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아이가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하게 할 수 있을까? 우리 지시에 저항하는 아이를 어떻게 다룰까? 처벌은 서로 적대적인 관계를 만들고 관계를 더욱 멀게 만든다. 짜증을 내는 아이를 무시하거나 버릇없이 구는 아이를 격리시키는 식으로 애정을 거두어들이면 아이의 안정감을 서서히 약화시킨다. 보상으로 매수할 때도 그렇다. 이런 모든 수법들은 아이가 또래의 소용돌이에 빨려들 위험으로 몰아간다. 그렇다면 부모가 사용할 수 있는 접근법은 무엇일까? 늘 애착을 의식하고 있으면 된다. 그 반대로 행동에 초점을 맞추면 부모로서 힘의 기반, 즉 아이들과 관계를 위협하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훈육은 가르침, 학습의 분야, 규칙의 체계, 자기조절과도 관련 있다. 그런 의미에서 먼저 훈육을 습득해야 할 사람은 부모들이다. 수년간 부모들과 상담을 해오면서 나는 이 문제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해서 자연적인 훈육의 일곱 가지 원칙으로 체계화 했다. 자연적이라는 말은 발달적으로 안전하고 애착에 우호적이라는 의미이다. 즉 부모-자녀의 관계와 아이의 장기적인 성숙 모두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사용했다. 이것은 원칙이지 공식이 아니다. 부모역할이란 무엇보다도 관계의 문제이고, 관계는 직관에 기초한다. 여기서 요구되는 것은 열정, 원칙, 그리고 통찰洞察이다. 나머지는 자연적으로 따라온다. 이미 만들어진 부모는 드물다. 애착과 순응을 통해 부모가 되는 것이다. 물론 애착은 우리에 대한 아이의 애착으로, 부모역할을 가능하게 해주고 부모로서 권한을 제공한다.

 

아이를 효율적으로 다루는 능력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을 다루는 능력이다. 아이에게 베풀고 싶어 하는 바로 그 동정을 우리 자신에게도 찾아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 자신의 자제심이 부족할 때 해결책은 우리 자신을 벌주거나 잘하라고 훈계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방법은 아이들에게도 그렇듯이 우리에게도 효과가 없다. 해결책은 우리도 역시 오류를 범하는 존재이고, 부정적인 감정이 우리를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있다. 때때로 아이들에 대한 분노가 치솟을 수 있다. 사랑의 충동이 다시 표면으로 떠오를 때까지 잠시 부모의 역할을 멈추어야 할 상황들도 있다. 그럴 때엔 우리가 타임아웃 하는 동안 부모로서의 임무를 배우자나 다른 신뢰할만한 어른에게 잠시 맡기는 것이다. 훈육은 당사자들을 적대관계로 만들어서도 안되고 그럴 필요도 없다. 다듬어지지 않고 미성숙하게 태어난 것은 아이들의 잘못이 아니다. 충동이 그들을 지배하고 우리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도 아이들의 잘못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