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나 한잔 들고가게!

노년 잘 살아가기

백파 2021. 3. 13. 09:04

아침 일찍 탄천으로 봄 구경 간다. 물오른 연두색의 버들가지가 봄이 왔음을 알린다. 따스한 봄바람이 불어와 이제 막 새 생명들을 움트게 하는 에너지, 그 기운이 내 몸에도 전해진다. 아직은 냉기가 있는 상쾌하고 부드러운 바람결이 뺨을 스치고, 따뜻한 봄 햇살을 쬐며 양지 바른 곳에 자리 잡아 봄을 즐긴다.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 내 꿈은 학교 선생이었다. 하지만 결국 회사원이 되었다. 그래도 은퇴 후에 아이들 독서지도를 하면서 선생님 소리를 듣는다. 지나온 60년 세월을 돌아보면 별로 내세울 것도 없다. 거울에 비친 현재의 내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나비가 날아 가버린 빈 번데기처럼 허울만 남아있다. 내 인생에서 나비는 무엇이었던가? 그 나비가 자식이었던가? 자식들은 독립하였고 손자, 손녀를 보았다는 것이 지난 세월동안의 삶의 결과라면 결과다.

 

그 동안 자연의 생존시스템 안에서 보호받으며 본능적 욕구에 따라 살아왔다. 이제 자연의 생존시스템에서 벗어나 생명체의 보호시스템도 사라지면, 본능의 구속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 아닌가? 생존시스템에 의해 살아오는 동안 오욕五慾만 쌓였고, 아직도 그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이들과 인물전을 읽으면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만일 역사적으로 훌륭한 인물로 평가받는 그들이 환갑을 넘기고 칠십 팔십을 넘게 살았더라도 계속 젊었을 때의 그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나이 들어가면서 지금까지 쌓아왔던 없는 인성마저도 계속 갉아먹고 있는 것은 아닌가? 노년을 잘 살아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노년이 되면 이제 많은 것을 내려놓을 때가 되었지만, 오히려 더 이기적이고 탐욕적이 되어 더욱 번뇌가 많아진다. 그래서 많은 현인들이 나이 들어서는 더욱 성찰하는 삶을 강조한다. 노년이 되면 비로소 자신의 삶을 살아갈 자유를 얻는다. 우리가 원했던 것이 그 자유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 자유를 감당하지 못하고 오히려 삶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육십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오면서 지식知識이 늘어나고 수많은 삶의 경험을 쌓아서 나는 지금 행복해졌는가? 삶에 대한 통찰력이 좀 더 좋아졌는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었는가? 더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더 인격이 높아졌는가?

행여 아이들이 삶을 포기하거나 공부를 포기할 것을 염려하여 '공부해야 한다'는 꼰대 같은 입에 발린 이야기를 한다. 공부의 목적은 ‘자신의 몸을 잘 만들어 성인이 되면 사회에 나가 잘 살아가기 위해서 란다’ 나는 공부를 ‘나를 만들어가는 모든 것’이라 생각한다. 일상의 모든 것이 공부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은 나이들어 직장에서 은퇴하는 시점일 것이다. 직장에서 은퇴한다는 것은 사회의 주류에서 물러나는 것이다. 세상의 경계에 있다는 것이다. 노년에는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 다시 다음 삶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 무엇을 배우고 익혀야 하는 시기다. 이제 몸은 생물학적 보호시스템에서 벗어났다. 스스로 치유하고 관리하는 능력을 잃어가고, 정신은 지금까지 험한 세상 살아오면서 온갖 쓸데없는 이념, 신념, 관념들에 아직 갇혀있는 오욕덩어리다. 이제 그런 내 몸과 마음을 내가 치유하고 관리해 주어야 한다.

 

나의 노년의 목표는 자연이 돌봄을 포기한 육신을 잘 간수하고 정신적으로 평정을 유지하는 거다. 마음이 편안하여 잠 잘 자고 밥 잘 먹으면, 몸은 자연히 건강해진다. 은퇴하고 나면 쓸데없는 것으로 나를 지키려 애쓰며, 다른 사람들의 별것 아닌 말에도 불같이 화를 낸다. 어떤 이가 자기 입으로 무슨 말을 하는 것을 내가 어찌하겠는가? 내가 분노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냥 염불소리로 알고 들어주면 되는 것을...

 

그리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려면 갈등이 없어야 한다. 갈등이란 대부분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갈등을 줄이려면 감당하지 못할 관계를 줄이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 착하게 산다는 것은 老子가 이야기 하는 ‘선자선지 불선자역선지 善者善之 不善者亦善之 (선한 사람에게 선하게 대하고, 선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역시 선하게 대한다)’ 의 그 선善이라는 것 아닐까? 노자선생은 인간에게 참 어려운 경지를 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