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나 한잔 들고가게!

책만 보는 바보 (안소영 지음)

백파 2020. 1. 19. 11:13

 

... 방안에 햇살이 들어와 앉으면, 가장 환한 곳에 책상을 가져다 놓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면 햇살은 천천히

 내 뺨을 지나고,  목덜미를 지나 책장을 넘기는 손등까지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마음에 와 닿는 책 속의

글귀도 따스하고, 얼굴에 와 닿는 햇살도 따스했다. 햇살은 내 눈을 환하게 해주고, 몸을 덮혀 준 것만이 아니었다.

햇살을 받아 환해진 책장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누런 종이 위에 놓인 검은 바둑알 같은 글씨들이 스멀

스멀 일어나는 것만 같았다그럴 때면 책장의 보풀 조차 한 올 한 올 일어서 눈부신 햇살 조각이 되었다.

 

햇살처럼 환하게 일렁이는 글씨들은 어느 순간부터 사람의 모습이 되고, 낯선 곳의 풍경도 되었다. 때로는 나에게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나도 마음 속으로 혹은 소리 내어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흐린 날에도 등잔불이 희미한

저녁에도, 나는 그 햇살을 책 속에서 볼 수 있었다새로운 책을 대할 때마다 또 어떠한 햇살이 들어 있어, 나에게

말을 건네고, 마음을 따뜻하게 해줄지 궁금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였다.

 

햇살과 함께하는 감미로운 책 읽기는 어린 시절뿐만 아니라, 그 뒤에도 계속되었다스무살 무렵 내가 살던 집은

몹시 작고, 내가 쓰던 방도 더욱 작았다. 그래도 동쪽, 남쪽, 서쪽으로 창이 나 있어 오래도록 넉넉하게 해가 들었다.

어려운 살림에 등잔 기름 걱정만 덜해도 되니 다행스럽기도 했다.

 

나는 온 종일 그 방안에서 아침, 점심, 저녁으로 상을 옮겨 가며 책을 보았다. 동쪽 창으로 들어온 햇살이 어느새

고개를 돌려 벽을 향하면, 펼쳐놓은 책장에는 설핏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책속에

빠져 있다가 갑자기 깨닫게 되면, 얼른 남쪽 창가로 책상을 옮겨 놓았다. 그러면 다시 얼굴 가득 햇살을 담은 책이

나를 보고 환하게 웃어주었다날이 저물어 갈 때면 해님도 아쉬운지, 서쪽 창가에서 오래오래 햇살을 길게 비껴

주었다.

 

햇살이 환한 방안에 가만히 앉아 책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신기하기도 했다.  햇살 위에 놓인 낡은 책 한 권이

이 세상에서 차지하는 공간은 얼마되지 않을 것이다가로 한 뼘 남짓, 세로 두 뼘 가량, 두께는 엄지손가락

절반쯤이나 될까? 그러나 일단 책을 펼치고 보면, 그 속에 담긴 세상은 끝도 없이 넓고 아득했다. 넘실넘실 바다를

건너고, 굽이굽이 산맥을 넘는 기분이었다.

 

책과 책을 펼쳐든 내가 이 세상에서 차지하는 공간은 얼마쯤일까기껏해야 내 앉은 키를 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책과 마음이 오가고 있는 공간은 온 우주를 담고 있다할 만큼 드넓고도 신비로웠다. 번쩍번쩍 섬광이

비치고, 때로는 우르르 천둥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하고 한 날 좁은 방안에 틀어박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처럼 날마다 책속을 누비고 다니느라, 나는 정신없이

바빴다때론 가슴 벅차기도 하고,  때론 숨 가쁘기도 하고때론 실제로 돌아다닌 것처럼 다리가 뻐근하기도

했다못 보던 책을 처음 보기라도 하면, 하루 종일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이덕무의 눈을 거치지

않고서야 어찌 책이 책 구실을 하겠느냐며  귀한 책을 구해 자신이 보기에 앞서, 내게 먼저 보내오는 친구도

있었다. 그럴 때는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고, 책표지만 바라보아도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좀처럼 웃을 일이

없는 생활인지라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하던 식구들도 나중에는 으레 귀한 책을 얻어서 그러려니 생각하였다.

 

누가 일러주고 깨우쳐 주는 사람없이 혼자 책을 읽었기에 막히는 구절이 나오면, 답답한 마음을 견딜 수 없었다.

얼굴은 먹빛처럼 어두워지고, 앓는 사람마냥 끙끙대는 신음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그러다 갑자기 뜻을 깨치기라도

하면, 나는 벌떡 일어나 미친 사람처럼 크게 고함을 질렀다. 방안을 왔다 갔다 하면서 깨친 내용을 몇 번이고 흥얼

거렸다눈 앞에 누기 있는 양 큰 소리로 일러주며 웃기도 했다처음에는 놀라던 집안 식구들도 나중에는 어이

없어 하며 웃었다.

 

온종일 방안에 들어앉아 혼자 실없이 웃거나 끙끙대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기도 하며, 책만 들여보는 날도 많았다.

사람들은 이런 나를 보고 간서치 看書痴라고 놀렸다.  '어딘가 모자라는 책만 보는 바보'라는 말이다나는

그 소리가 싫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