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파 2016. 1. 14. 20:32

빙하시대, 인간이 살아남기 위한 투쟁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예술이 탄생한 것도 이 시기였다. 빙하시대의 가장 유명한 예술품은 프랑스에서 시베리아까지 유라시아전역에서 발견되는 거대하고, 인상적인 동굴벽화 이다. 그림의 주제는 사슴과 야생소, 버팔로, 매머드 등 사냥감이다. 최초의 의사소통은 사슴을 그대로 재현하는 그림에서 시작되었다. 이 그림은 사슴을 의미하는 추상적인 그림이 되었다. 그림문자라고 하는 그러한 그림이 글쓰기의 가장 초기형태였다. 그림문자는 음절에 기초한 글자로 체계로 발전했다. 기원전 1만년전 무럽, 지구가 다시 따뜻해졌다. 구혈(암반巖盤으로 이루어진 하천바닥에 생긴 원통형의 깊은 구멍)과 단층이 생겼다.  해수면이 다시 올라가면서 아메리카와 유라시아를 열결하던 땅은 이제 바다이다. 남극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살게된 호모사피엔스는 또 다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했다. 거대동물도 죽어가고 있었다. 사냥감이 줄어들자 채집이 더욱 중요해졌다.

 

야생과 나무뿌리와 나무열매를 조직적으로 수확하면서 유목생활은 점점 줄어들었다. 야생곡물을 채집하는 것과 씨를 뿌리고 경작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후자는 농업이다. 남자는 사냥을 하고, 여자가 야생곡물을 채집했기 때문이다. 그 최초의 여성은 기원전 9000년전무렵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남부에 살았던 나투피안 종족으로 추정된다. 밀이 스스로 번식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도 오랜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나투피안족은 수확한 씨를 받아 키울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뜻한 봄이 되면 나무 괭이로 땅을 갈고, 저장해둔 씨를 뿌렸다. 씨앗은 단백질과 탄수화물이 풍부해 거의 완벽한 식량원이다. 빨리 상하지 않아서 저장과 운반도 쉽다. 사냥과 채집의 문화에선 먹을거리를 첮아 끊임없이 이동해야 했다. 그래서 여자는 아이가 걸을때까지 다음 아이를 낳지 않는다.

 

그러나 정주생활이 보편화 되자 사정은 달라졌다. 출생률이 높아지고 인구가 증가하자 더 많은 밭이 필요했고, 밭이 많아지자 일할 노동력이 필요했다. 몇 년간 집약적인 경작으로 토양이 산성화 되거나, 흉년이 들면 기근이 닥쳤다. 농경인 수렵채집인에 비해 체구가 더 작았고 질병에 더 자주 시달렸으며, 더 일찍 죽었다고 한다. 농사를 시작하기는 했지만 유목생활을 완전히 끝낸 것은 아니었다. 땅을 갈고 씨를 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수확하고 나면 다시 이동했다. 그러나 정착생활이 완전히 뿌리를 내리고, 성별에 따른 역할도 변했다. 이에 따른 새로운 사회구조와 부의 개념이 확립 되었다. 기원전 7000년전 무럽에는 터키서부에서 현재의 파키스탄까지 끝없이 펼쳐진 지대에서 밀과 보리를 경작했다.

 

기원전 5400년 무렵 정착농업에 바탕을 둔 생활방식이 중동, 이집트, 인도북부지방, 중국의 양쯔강과 황하유역이다. 중앙아메리카의 고대인들도 기원전 1만년에서 기원전 7000년사이에 옥수수를 개량하기 시작했다. 농업은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영구경작지가 개간되고, 수확량도 증가했다. 수확량 증가는 잉여 곡물을 낳았고, 잉여곡물은 공동체의 확대로 이어졌다. 이제 몇몇사람은 공동체에 필요한 다른 것을 생산했다. 도공, 방직공, 벽돌공, 금속세공인 등.... 기원전 9000년무렵, 최초의 도시가 서아시아에서 나타났다. 잉여 곡물을 노린 유목민의 침략이 빈번 했고, 이를 방어하고자 언덕에 마을을 세웠다. 나투피안족의 예리코가 유명하다. 예리코는 팔레스타인의 서안지구이다. 신석기 시대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마을은 예리코만이 아니다. 터키, 불가리아, 파키스탄, 중국 등의 도시들의 공통된 특징은 홍수를 다스리려고 관개에 힘썼고, 신전과 곡물창고를 세웠다.

 

죽은 사람을 위한 의식이 있었고, 신에게 제물을 바쳤다. 신석기시대의 농업기술로는 불어나는 인구를 부양할 수 없었다. 몇년동안 집약적인 경작을 하고 나면, 토지의 비옥도는 떨어졌다. 이런 고질적인 한계를 벗어날 방법은 홍수로 땅이 비옥해진 강유역을 찾아다니는 것이었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에 있는 메소포타미아는 말 그대로 강 사이에 끼인 강이라는 뜻이다. 최초의 문명, 도시국가인 수메르가 탄생한 곳이 바로 이 메소포타미아이다. 아브라함이 도망나온 곳으로 유명한 구약성서속의 도시 우르는 수메르왕국의 수도였다. 수메르인은 문자를 발전시킨 최초의 민족이다수메르인이 사용한 문자는 설형문자로 알파벳과 그림문자 중간 형태이며, 약 3000개의 글자를 가진 음절문자이다. 현재 남아있는 최초의 점토서판은 기원전 3100년무렵의 것이다. 수메르 도시국가는 기원전 2004년 이란의 침략자들에게 멸망당했다.

 

기원전 3000년전 무렵 인류는 새로운 기술적 도약을 보여준다. 거대한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도 문명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미개한 서유럽 청동기문명도 대규모 토목건축에 집중했다. 그중에서도 영국의 스톤헨지와 기자의 피라미드는 5000년이 지난 지금도 세계불가사의로 남아있다. 돌을 이용하여 한창 역사적인 구조물을 쌓던 시기에 또 다른 곳에서는 새로운 재료인 금속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이 금속때문에 우리 삶은 농업중심에서 산업과 전쟁중심으로 전환된다. 인간이 처음으로 사용한 금속은 구리였다. 구리는 물러서 작업하긴 쉬웠지만, 잘부러지는데다가 값이 비싸서 생활도구보다는 장신구에 적합했다. 그러다가 기원전 3000년전 무렵 서아시아의 금속공이 구리에 주석을 섞으면, 훨씬 더 강해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구리와 주석을 섞은 청동은 구리나 주석만을 사용했을 때보다 훨씬 강할뿐 아니라, 칼날을 날카롭게 벼릴수 있었다.

 

농업혁명이 중동발생지에서 널리 퍼지기까지는 수천년이 걸렸지만, 새로운 청동기술은 순식간에 보급되었다. 청동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주석을 얻기 위해, 발트해 연안에서 지중해를 거쳐 북인도까지 지역 무역망이 발달할 수 밖에 없었다. 청동기시대 자원이 증가하면서 그만큼 생존의 불안도 커졌다. 새로운 군사계급이 생겨났다. 역사상 최초의 무기는 동물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죽이기 위한 것이었다. 기원전 1500년대는 청동기 세대의 절정기였다. 청동은 중국의 상왕조에서 영국의 야만족에까지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