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봉. 바라볼 수밖에 없는 봉우리입니다. 우리나라 산이나 봉우리 이름은 불교 영향을 받은 것이 대부분입니다. 보현보살은 자비와 이치를 상징하는 보살로 중생의 목숨을 길게 하고 교화하는 보살이며, 지혜에 있어 문수보살이 으뜸이라면, 실행 있어서는 보현보살을 으뜸이라고 합니다 . 중생은 그저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는 봉우리입니다.
누구나 그렇듯이 저도 은퇴 후에는 산기슭에 초막이나 한 칸짓고 텃밭 가꾸며, 책을 읽으며 하고 싶은 공부나 실컷 했으면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었지만, 내 의지 부족인지, 이런저런 탓에 아직 도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세속적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살아갑니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산방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현실적인 삶 속에서 세속적인 것을 내려놓는 것이 쉬운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내려놓고 나니 내 스스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아이들과 그림책도 보고, 동화책을 읽으면서 그림 하나, 낱말 하나가 새롭습니다. 책 속의 단어 하나하나의 뜻을 다시 알아 갑니다. 모든 것을 다시 배워 나갑니다. 지금은 삶에서 무엇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니 오히려 마음은 편하고 좋습니다. 어쩌면 인문학 책을 수백권 읽는 것보다 세속적 경험과 깊은 생각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무조건책만 읽는 나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중국 임제선사는 ‘사람 떠난 불법이 따로 있다면 그 사람은 외도의 길을 든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현실을 떠난 깨달음이있을 수 없습니다. 불성이란 것도 예수님의 사랑도, 그 기반이 되는 것은 평등이라고 생각합니다. 평등의 실행이 정의입니다. 우리만이 선이고 옳다는 생각은 종교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다는 것도 평등사상을 강조한 것이며, 예수님 사랑도 평등함이 기반입니다. 성령도 평등심이 없으면 내 마음에 깃들 수 없습니다. 성령이 없으면 그 마음이 예수님께 연결될 수 없습니다. 나만 구원받고, 우리만 구원받는다는 생각은 예수님 말씀을 따라 살고 있지 않는 것으로 나는 이해합니다.
차별이 있으니 시비가 있고, 선악이 있고, 다툼이 그치지 않습니다. 내 마음에 시비분별이 없으면 편안해집니다. 내가
편안해지면 남도 편안해지고, 상대가 부처로 보입니다. 나는 아직 바라만 보는 경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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