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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나 한잔 들고가게!

걷기

나는 은퇴만 하면 자연 속에서 살 것이라는 이야기를 오래전부터 하고 다녔다. 어떤 지인은 강천산 근처의 순창 지역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실행을 못하고 있다. 공간은 옮기지 못했지만 그들의 삶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책은 우리에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살고 싶은 욕구, 지금과는 다른 식의 살고 싶은 욕구를 제공한다. 책은 다른 삶을 희망하게 한다. 단조로운 일상생활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삶을 또 다른 삶으로 옮아가도록 한다. 내가 어디서 어떻게 살겠다는 삶의 방향에 많은 영향을 준 책이 스콧 니어링의 ‘조화로운 삶’과 소로의 ‘월든’이다.

 

"...소로는 대량생산의 시대와 자본주의 시대를 경혐하면서 이익을 얻기 위한 무한경쟁과 이익을 얻기 위해 자연의 대규모 약탈을 예감했다. 그는 끝없이 계속되는 부의 축적과 맹목적인 자본화를 앞두고 새로운 경제를 제안했다. 이 새로운 경제원칙은 간단하다. 이제는 어떤 활동이 어떤 이익을 가져다줄지 생각하지 말고, 그 활동이 순수한 삶의 순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를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이익과 혜택을 구분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숲 속을 오래 거닐면 거기서 이익을 얻을 수 있는가? 단 한 푼의 이익도 낼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걷는다는 것은 절망적일만큼 쓸모없고 비생산적이다. 그것은 부를 생산하지 못하는 잃어버린 시간, 낭비된 시간, 죽은 시간이다. 그렇지만 내가 받는 총채적인 삶에서 받는 혜택은 엄청나다.

 

걷기는 사람을 성가시게 하는 근심걱정에 시달리지 않고 오로지 나 자신으로 있게 한다. 나는 하루 종일 나 자신에게 혜택을 축적한다. 오랫동안 귀를 기울이거나 명상을 하면 자연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색, 소리, 상쾌함, 고요함.. 그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었다. 궁극적으로 걷기는 물질적 이익은 주지 못하지만 그 대신 더 큰 혜택을 준다.

 

이익이 혜택과 다른 점은 이익을 남길 수 있는 활동은 나 말고 다른 사람이 할 수도 있다. 이익을 남기는 행위는 언제라도 다른 사람이 할 수 있기 때문에 경쟁을 해야 한다. 내게 혜택을 주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권한을 위임할 수 없는 나의 행위와 동작, 삶의 순간에 따라 좌우된다.

 

소로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싶은가? 자네가 어떤 일을 하려 할 때는 ‘누군가 다른 사람이 나 대신에 이것을 할 수 있을까?’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만일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있다면 그 일을 그만두라.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그 일을 해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 누구도 내면 깊숙한 곳에서 우리 대신에 살아줄 수 없다. 누군가 우리를 대신해서 일을 해줄 수는 있지만, 우리를 대신하여 걸을 줄 수는 없다. 만일 나 자신이 아니라면 과연 구 누가 나를 대신해서 내가 될 것인가? '

 

인간이 부유하고 부유하지 않고는 느끼거나, 느끼지 않느냐에 달려있다. 소로는 양의 경제적 계산을 버리고 순수한 질만을 택하라고 하지는 않는다. '나는 정확히 무엇을 얻거나 잃는 것일까? 더 많은 돈을 벌려고 애쓸 때 나는 순수한 삶에서 무엇을 잃은 것일까? 부자들이 부를 유지하려면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일을 해야 하고, 불안해야 하고 시간을 소비해야 한다. 물론 지붕도 있어야하고 삶의 도구들이 있어야 한다. 더 좋은 집, 좋은 옷, 더 좋은 살림도구를 위해서는 상쾌한 바람, 높고 푸른 하늘과 자연의 아름다움은 잊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누구에게 이로운가?

 

추위를 막아줄 집과 따뜻하게 잠잘 이불과 최소환의 살림도구를 위해서는 돈이 별로 들지 않는다. 일손도 그러한 것들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 많이 일손이 필요하지 않다. 약간의 육체노동이 필요하고 여유로운 일상을 즐기며, 할 것이 없으면 오랫동안 산책을 하며 공기와 날씨와 별과 자연의 전경을 한 없이 즐기면 된다. 가족으로부터 구속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면 쓸모없는 것, 하찮은 것, 호사스러운 것을 위해 내 삶을 소비할 필요가 있을까?

 

노동은 부를 창출하기도 하지만 가난을 유발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가난은 부의 반대가 아니다. 가난은 부의 보완물이다. 부자는 옆 사람의 접시에 음식이 더 많이 담기지 않는지 보면서 게걸스럽게 먹는다. 가난한 사람은 축하연의 빵부스러기에 매달린다.'

 

소로가 말하는 청빈은 부와도 가난과도 반대가 된다. 그에게 부는 항상 더 많이 갖게 위해 이성을 잃은 자들이고, 가난 역시 아무것도 아닌 것을 더 많이 얻기 위해 죽도록 일하는 자들이다. 청빈은 검소함을 선택한다. 검소함은 금욕이 아니다. 금욕은 항상 지나치게 많은 비싼 음식과 지나치게 많은 부, 지나친 쾌락 등 지나친 유혹에 대한 저항이라는 개념을 내포한다. 검소함이란 물과 과일, 미품 등 흔하디 흔한 이런 것들의 즐거움을 발견하는 것이다.

 

재산과 부를 얻으려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쉬지 않고 일해야 하고 모든 것을 희생하여 끊임없이 일하고 또 일한다. ‘나는 내가 보는 것을 내 것으로 만든다’라고 소로는 말한다. 자연 속을 걸으며 채색된 감정과 나의 이야기, 추억을 축적한다는 얘기다. 우리의 진짜 재산은 우리가 간직한 심상心想의 합이다.

 

부자의 영혼은 물질적 재산으로 몸을 감싸다보면 껍질이 더 단단해져 안락함을 포기하기 어려워진다. 가난한 사람의 영혼은 부를 소유하지 못하는 것에서 생기는 질투심과 분노 때문에 얇아져 물질의 포로가 되어 계속 물질을 추구하게 된다. 부는 많은 사람에게 많은 고통을 안겨준다. 정신을 살찌워 스스로의 삶을 풍요롭게 해야 한다.

 

걷기가 어렵지도 않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걷기 위해 아주 멀리 갈 필요는 없다. 걷기의 참뜻은 다른 세계, 다른 사람 다른 문화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문명에서 벗어난, 그것의 바깥쪽에 서 있는 것이다. 일하는 사람들의 바깥에, 이익과 빈곤의 생산자들의 바깥에 부드러운 햇살과 봄에 불어오는 바람의 상쾌함에 서 있는 것이다..." (프레데릭 그로의 '걷기, 두발로 사유하는 철학'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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